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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이전의 기록/Creative

[자작판타지비스무레]바람의 통로 / 1996년 作


바람의 통로 / 1996년 作

달포째 상서롭지 않은 서풍이 이 마을을 서성거렸다. 바람은 마을 서편에 두텁게 가로막고 있는 숲 나무들의 잎사귀를 보듬고 들어와, 마치 오래전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나그네의 눈길처럼 마을의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렸다. 동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남북으로 바람도 넘기 버거울 법한 높은 산맥, 그 사이에 펼쳐진 이 마을에 있어, 서쪽에 버티고 선 숲은 견고한 성벽이기도 했지만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통로는 일년에 단 한 번, 서풍이 숲을 통해 불어오는 이맘때만 열린다고 이 마을의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바람이 두런거리며 숲을 가로질러 들어올 때, 나뭇가지들이 가리키는 반대 방향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마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나무가지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맡기면 되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이치일 터였다. 믿음으로만 전해지는 이러한 통로를 이들은 바람의 통로,라고 불렀다. 몇몇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이 그 믿음을 비웃으며 바람의 통로가 열리지 않았을 때, 숲을 통해 이 마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숲에서 같은 자리만을 맴돌다 지친 모습으로 마을로 돌아오거나 이 숲으로 나무하러 온 젊은 장정들에 의해 주검으로 발견되어 돌아오곤 했다. 다만 바람의 통로가 열리는 무렵에 길을 떠났던 몇몇 사람들만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는데, 숲에서 그들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적으로 이 마을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이 마을이 이렇게 외부로 통하는 문이 닫히게 된 것은, 오십여년 전, 이 마을에 머물던 한 음유시인이 보자기에 갓난 계집아이를 품고 떠나면서 이 마을을 저주하며 서쪽 숲에 강한 결계(結界)를 걸어놓은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미덥지 못한 조작된 이야기라고 믿기도 했지만, 이제 막 칠십 세를 맞이한 이 마을의 장로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회상하여 이야기해주었을 때 모두들 그것이 사실임을 믿게 되었다. 장로의 이야기가 못미더웠던 한 젊은이가 결계가 걸렸음에도 일년에 한 번 바람의 통로가 열리는 까닭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장로는 나즈막이 말했다.
“이 마을엔 강한 모성(母性)의 기운이 있지. 그가 강한 결계를 걸어놓은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그 역시 이 마을의 모성의 기운을 거스를 순 없었지. 사람이 어머니의 품에서 태어나 결국은 다시 어머니의 품을 찾는 것처럼, 언젠가는 돌아올게야. 그들이, 그리고 그들의 운명이. 그리고 그 운명이 곧 올것만 같구먼. 곧......, 아주 곧 말이야.”
이날 잔치가 끝나고 장로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장로는 예지 능력이 뛰어나고 사리판단이 정확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는데, 그가 잔치에서 남긴 말은 마치 묵시록의 예언처럼 사람들의 가슴 속에 골깊은 불안감을 새겨놓았다. 곧......, 아주 곧 다가올 운명,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든 장로가 속히 다시 일어나 ‘그들’이라 칭한 이들이 누구이며, ‘운명’이란 무엇인지를 말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장로는 간간히 일어나 미음을 힘겹게 들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장로가 깊은 잠에 빠지고, 서풍이 약해지면서 사람들은 장로의 말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장로의 노망이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그것이 아주 먼 미래의 일일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유야 어쨌든 사람들은 자연스레 일상으로 돌아왔고, 장로의 예언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일도 없어졌다. 그렇게 사람들이 장로의 말을 잊어가고 있을 즈음, 숲에서 사냥을 하던 백작 아들 아우구스가 나뭇가지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마을로 향해가는 젊은 아가씨를 발견했다. 그녀의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고 오랜 여행 탓인지 옷 구석구석에 먼지와 진흙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까닭없이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아우구스는 그녀의 신비스러운 느낌에 넋을 잃고 말았다. 마을 처녀들을 자주 희롱하여 온갖 좋지 않은 평판을 받고 있던 아우구스는, 성급하게도 이런 여자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자신의 말 앞에 와서 마을의 방향을 물었을 때, 아우구스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오, 고귀하신 이여. 저는 운명이 손짓을 따라 왔답니다.”
살포시 미소를 띄우며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우구스는 아들은 자신이 이 여자에게 완전히 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어쩌면 이 여자가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클라우디였다. 백작 아들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말에 태우고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장로가 벌떡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운명이 왔어, 운명이. 아아...... 운명이......”
그러고는 다시 침대 위로 쓰러져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잠이 들었다.
백작은 길길이 뛰며 아들을 나무랐다.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떤 신분일지도 모르는 그런 여자를 자신의 며느리로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랜 다툼 끝에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백작은, 클라우디를 시녀로 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신분도 모르는 낯선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것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실망한 아우구스는 미안하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고귀하신 분이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저의 운명이겠지요.”
그녀의 때묻지 않은 목소리와 미소가 아우구스를 슬프게 했지만, 사실 그는 인근 후작의 딸과 이미 약혼이 되어 있는 터였다.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정략적인 결혼이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멋대로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민이었다면,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마을 처녀들을 희롱하거나 못된 짓을 일삼고 다니는 것도 자신의 그런 처지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다.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되어, 아우구스는 후작과의 약속에 따라 결혼을 했다. 처음부터 사랑없이 이루어진 결혼이었기에 그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사소한 일로 다투기 일쑤였고, 오히려 아우구스의 클라우디에 대한 마음만 깊어질 뿐이었다.
언제인가부터 클라우디의 배가 불러오면서, 아우구스는 클라우디와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점점 아쉬워졌다. 백작과 백작 부인이 시녀를 험하게 다루는 것도 못내 마음아팠다. 어느날 백작에게 심한 말을 듣고 계단을 올라오는 클라우디를 향해, 아우구스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우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고귀하신 분이여, 노여워 마십시오. 이것이 저의 운명이겠지요.”
순간 아우구스는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우디는 그저 저의 운명이겠지요,가 전부인 것이 야속했다. 도대체 뭐가 운명이란 말인가. 운명에 따라 그저 그렇게 자신을 만나고, 운명에 따라 그저 그렇게 자신의 아기를 가졌단 말인가.
“뭐가 운명이란 말이야, 당신은 항상!”
자신을 수습하고 나자, 아우구스는 자신이 분에 못이겨 클라우디를 계단 아래로 밀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가 클라우디를 흔들어 깨우자,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아...... 운명이랍니다...... 운명, 운명이 오고...... 있어요...... 이 아이의 심장......은 이 아이의 것......이 아.......아니니, 사랑만이 모든...... 것을 용서할......”
그리고는 클라우디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아이가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후에야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아기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아이였는데, 이상한 것은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