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년 6월 이전의 기록/Creative

[짧은소설]병아리 / 1996년 作


병아리 /1996년 作

  진달래 잎새마다 햇빛 잘게 부서지는 교정을 오르며 당신의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금은 버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여자아이들의 음계 높은 재잘거림을 들으며, 투명하게 반짝거리던 당신의 눈동자와 해맑은 웃음이 생각났던 것 뿐이지요.
  오늘 수업은 하루종일 엉망이었습니다. 상자 속에 조심스레 넣어 둔 병아리가 걱정되어서였습니다. 혹 모이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병이나 나지 않았을까 하면서... 병아리에게 혹시나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루 한 귀퉁이에 매어 둔 나의 강아지, 아지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갑자기 웬 병아리냐고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어제의 일이었지요. 교문을 나서 골목을 돌아 집으로 향해 가는 길, 네모난 상자 가득 병아리를 담아 아이들에게 팔고 있었습니다. 나의 추억은 종종 현재형입니다. 문득문득 의식의 표면으로 불거져 나와 옛 이야기를 조잘거리다 사라지곤 하거든요. 그때, 당신의 생각이 났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당신이 저에게 띄웠던 첫 번째 편지를. 나에게는 넓은 창문과 얌전한 꽃, 자그만 병아리 한마리와 조금은 장난스러운 강아지가 잘 어울릴 거라고 하셨던 그 편지.
  이런 저런 생각의 틈새를 비집고 선생님,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아이가 조그마한 봉지를 내 손에 건네주고는 선물이예요,하며 쪼르르 사라졌습니다. 봉지 안에는 머리 위에 노란 반점이 유달리 짙은 병아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끄집어 내어 쓰다듬어 보았습니다.하릅 병아리가 그렇게 작다는 것을 저는 어제 처음 알았지요. 어린 시절 백원을 주고 병아리를 산 적이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두 손으로 병아리를 감쌌을 때, 손안에 느껴지는 넉넉함이 얼마나  가슴 벅찬 느낌이었던지... 제가 너무 커버린 탓일까요? 지금,병아리는 너무도 작고 외로워 보입니다. 나는 녀석에게 '아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예쁘지요?  병아리 아리. 하지만...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었을까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들여다본 상자 속의 아리는 힘없이 누워만 있었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리의 투명한 눈동자, 그 속에 비친 나. 숨이 막혔습니다. 언젠가 당신의 눈을 바로 보았을 때에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당신의 투명한 눈동자, 그 속에 비친 나. 숨이 막혔습니다.
  문득 재은이라는 이름의 계집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유난히 아이를 좋아하던 나. 한동안 아는 분의 유치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재은이는 그때 만났던, 눈이 무척이나 투명한, 웃음이 무척이나 맑은  아이였습니다. 저를 너무도 따랐던 까닭에 저에게 '재은이 아빠'라는 별명까지 붙기도 했었지요.
  유치원에서의 일이란 것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나와 정리를 하고, 중간에 한 번, 아이들 보내고 한 번, 이렇게 세 번을 정리하는 것이 주된 일과였습니다. 낮잠 시간에 아이들 다독여 주는 일,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지요.
  아이들이 고장낸 장난감을 고쳐주는 일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 장난감이라는 것이, 어느 한 부분이 부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움직이는 장난감인 경우에는 전선 한 부분이 끊어졌다거나 한 간단한 고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기계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고치지 못하는 고장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장난감이 고장나기만 하면 저에게로 쪼르르 달려오곤 했습니다. 장난감을 고쳐주었을 때 아이들의 환한 웃음은 얼마나 저를 기쁘게 했던지...  장난감을 얼싸안고 저의 뺨에 뽀뽀해 주었을 때, 그 간지러운 느낌은...
  어느날은 재은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등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이것 좀 고쳐줘요,하며 쏘옥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병아리 시체였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무척이나 눈이 투명한 재은이, 나이 여섯. '죽음'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나이였을까요? 오랜 침묵, 고쳐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이젠 죽어서 재은이 곁을 떠났다는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습니다. 재은...아. 난... 고쳐...줄 수 없어.  ...이들에게는 생명...이란 것이 있어. 그건 장난감...  나사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또 다시 오랜 침묵, 재은이가 울먹거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집 강아지도... 나중에 이렇게 되는거야? 그래,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잘... 해줘야지. 그제서야 재은이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작은 눈에 이렇게 큰 눈물방울이 맺힐 수 있었던가, 이 작은 눈에서 이렇게 많은 눈물이 흐를 수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재은이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뒤로 며칠동안 재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애써 웃음을 보이며 재은이를 도닥여주던 그 며칠이 지나고 재은이의 입가에 조금씩 웃음이 돌아올 무렵이 되어서야 그동안 힘겹게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습니다.
  다행히 내일은 일요일입니다. 어쩌면 당신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당신의 투명한 눈동자와 해맑은 웃음을 보고 싶었지만 말입니다. 아리의 곁을 지켜야겠습니다. 다시 일어나 귀엽게 삐약거리는 모습을, 장난스레 날갯짓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요. 내일 성당에 가거든 꼭 기도해 주시겠죠? 살아있는, 그리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위해... 그리고... 나의 병아리 아리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