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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이전의 기록/Creative

[소설]狂氣의 構造 / 1996년 作

狂氣의 構造 / 1996년 作

狂氣도 전염되는 것일까, 이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재잘거리는 여자아이들의 음계 높은 재잘거림을 뒤로하며 교문을 나선다. 토요일의 방과후, 교문은 유달리 소란스럽다. 저마다 하나쯤의 약속을 가지고 있을 법한 환한 표정, 까르르 부서지는 웃음소리는 아직 학교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초임 교사의 일주일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꽉 짜여진 학교 수업, 학원 시간표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등에 짊어진 묵직한 가방의 무게로 삶의 무게를 지레 짐작해버린 아이들에게도 토요일은 넉넉한 해방감을 주기에 충분한 날일 것이다. 아, 그 맑은 아이들의 눈동자란. 아이가 아이다운 것을 볼 때의 마음은 왜 그리도 넉넉하고 흐뭇한 것인지.
내가 이 중학교에 부임한 지도 어느새 두 달이 흘렀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교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위태로운 선택이었는지. 몇 번이고 갈등하고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 했다. 그것은 이년 전, 한달 여의 교생 기간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갈등하게 했던 것이다. 다시금 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은, 중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박선배의 충고 때문이었다.
나라면..., 너처럼 시작도 해보기 전에 불행한 결말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겠어. 네가 걱정하는 것은 네가 말하는 것처럼 광기에 전염되고 있는 아이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이 그 광기 속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어서 그런 무척 이기적인 생각이라고는 생각 안해봤니?
습관처럼 우편함을 열어 우편물을 끄집어내고 계단을 오르면서 하나씩 확인한다. 보습학원 광고지, 정기구독하는 시사 주간지, 전화요금 고지서, 그리고 그 의미 없는 우편물 사이에 끼어 있는 편지 한 통, 보내는 이 장우철... 장우철?
시사 주간지를 뒤적인다. 굵직굵직한 헤드라인만 눈가에 어른거릴 뿐, 내용은 들어오지 않는다. 신문을 뒤적인다. 두렵다. 편지 속에는 글자들이 빨리 편지를 뜯어주기를 아우성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꼭 자상한 누나같아,변성기를 맞이하여 약간 쉰 듯한 우철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편지를 열면 우철이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와 무언가 재잘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저 편지를 열면...
선생님은 꼭 자상한 누나같아.
남자 선생님보고 누나가 뭐니? 형이라면 몰라도.
그래두요.
엉덩이를 툭 치고 환한 웃음으로 도망치는 조금은 건방진 그 아이, 나이 열 다섯. 우철이의 아이다운 웃음과 환한 표정이 좋았다. 그 웃음과 환한 표정, 그리고 조금은 건방진 우철이의 행동이 교생실습 첫날 긴장되고 불안한 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를 심어놓았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작은 희망과 함께, 그렇게 우철이는 내게 다가왔다.

한혁주 그녀석을 기필코 잡았습니다. 그녀석, 불량 서클의 보스 격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었거든요. 이번엔 현장에서 그녀석들을 잡았습니다. 경찰서에서 혁주 그자식이 두목이라고 모두 입을 모아 자백을 했어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혁주 그자식 퇴학시킬겁니다. 담임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강선생님?
강한 눈매를 지닌 학생주임 황선생님, 약간은 빈정거리는 말투. 말 안듣는 아이는 그저 매가 약이야,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황선생님에게는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릴 듯 싶었다. 이 학교에 부임하기 전, 압구정동에 위치한 S 중학교에서 근무하셨다고 했다. 불량한 학생들을 격리시키는 것이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는 분으로, 교생 대기실에 교생을 모두 모아두고 특강이라는 명목으로, 학생 선도 사례를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동안 황선생님은 몇 명을 정학처리하고, 또 몇 명의 학생을 퇴학처리하신 것일까? 황선생님의 특강을 듣는 동안, 나는 고등학교 시절 불법 복사본으로 떠돌던 핑크플로이드의 뮤직비디오를 떠올리고 있었다.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 제법 도발적인 멜로디 라인과 가사, 그리고 화면에는 아이들이 죽 늘어서 기계의 한 쪽 입구로 빨려 들어가 다른 쪽 출구에서 소시지가 되어 나오던 ‘The Wall’의 애니메이션 한 장면.
내가 배정된 이학년 삼반의 담임, 강선생님.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던 강선생님의 눈동자. 오후에 징계 특별 위원회가 있으니 담임으로서 꼭 참가해 주십시오,황선생님의 일방적인 통보,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던 교사 경력 오년의 강선생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교생선생님은 징계 위원회에 참가하실 필욘 없습니다. 정식 담임선생님도 아니고, 또 이런 모습을 보시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하신 강선생님의 충고. 나는 앞으로 교사가 되면 겪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이런 기회를 통해 교직 생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냐며 끝내 함께 참석하기를 청했다. 강선생님의 몇 번의 만류는 나의 참석 의지가 굽혀지지 않자 점차 사그라들었다.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 아이들... 소시지... 그리고 일천구백구십사년의 대한민국 서울, 그리고 사립 H 중학교 이학년 삼반.

징계 위원회의 안건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혁주의 퇴학은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범행에 가담했던 아이들, 나아가서 그 서클의 일원으로 판단된 아이들에 대한 징계에로 좁혀져 있었다.
잡혔던 아이들의 말을 통해 작성된 그 서클의 조직표입니다.
급하게 작성된 듯한 복사물을 배부하신 황선생님은 그 서클의 모든 학생을 징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직한 말투로 주장하고 계셨다. 두목 한혁주, 연락책 ..., 조직책..., 이 복사물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서클은 상당히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마피아의 패밀리를 연상케 하는 조직표, 종이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이름, 2-3 장우철. 이 아이들은 기성 사회의 광기어린 부분을 모방하여 또 하나의 작은 광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섬찟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 땀. 강선생님의 만류를 들었어야 했어, 나는,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본 우철이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어. 아득한 곳에서부터 나의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
항상 입버릇처럼 드렸던 말씀입니다만, 불량 학생들을 교육환경에서 제거하는 것이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이들 전체의 강력한 징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선생님의 말투는 좀체 누그러질 기색이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선생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황선생님의 극단적인 대안에 다른 선생님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보이질 않아... 느껴지질 않아... 저들의 생각이.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외였다. 묵묵히 황선생님의 말씀에 묵묵히 수긍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강선생님의 조용한 목소리.
학생들은 똑같은 포장지에 싸여 똑같은 상표가 찍혀 있는 과자 부스러기 따위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학생 개개인을 이해하고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정학, 퇴학이라니요. 그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이건 미친 짓입니다. 작년에 황선생님이 부임하신 이후, 학교 선도부의 권한이 강화된 것은 여기 계신 선생님들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아니, 그건 권한이 아니라 권력입니다. 광기에 가까운 권력.
강선생님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이 사람이 내내 힘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던 바로 그 강선생님이었던지. 사실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 놀랐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학교 선도부였다. 며칠 되지 않아 정확한 사정은 파악하고 있지 못하지만, 이 학교의 선도부원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을 행사할 권한 같은 것이 주어져 있는 듯이 보였다. 반 아이들을 파악하고자 돌렸던 설문지, 학교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까?라는 문항에 많은 아이들이 선도부의 힘이 너무 세다고 대답했던 것도 그때문인 것 같았다.
얼굴이 붉어진 황선생님.
그건 폭력이 아니오. 학원의 안정을 위해 주어진 통제의 힘일 따름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이 학교에는 지금과 같은 불량 서클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도부의 권력이 강화된 이후, 나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요. 그건 아이들의 눈이 아닌, 바로 어른들의 눈을 통해 아이들을 이해하고자 했던 데에서 생기는 오만입니다. 현재 선도부의 조직은 또하나의 합법화된 폭력 구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선도부에게 그런 권한이 위임된 이후, 소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불량학생들은 오히려 나름대로 조직과 체계를 갖추고 그 폭력에 대항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고함에 가까워진 황선생님의 목소리, 동요 없이 나지막한 음성을 풀어내시는 강선생님. 징계 위원회는 이들 두 선생님의 논쟁으로 가득했다.
불량 학생들의 폭력을 그냥 내버려두자는 얘깁니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폭력을 징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 이 발상부터가 문제였다는 얘깁니다. 아이들은 모두 다른데 하나의 잣대로 그들 모두를 재려고 한다는 것, 이것은 폭력이 아니라고 보십니까?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어른들의 잣대로 그 아이들의 세계를 측정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징계 위원회는 서클의 일원 모두를 징계하자는 황선생님의 주장과 선도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강선생님의 논쟁으로 압축되었고, 결국은 두목격인 한혁주만을 퇴학시키고 폭행에 가담한 학생들만 근신 처분하는 방향으로, 교장선생님은 결정을 지었다. 그들 모두를 감시할 것이며, 만일 이런 일이 또 있을 경우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황선생님의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징계 위원회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이던 눈빛은 사라지고, 강선생님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황선생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들을 묵묵히 듣고 계셨다.

여전히 우철이는 까불거리며 맑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언니! 뭐 안좋은 일이라도 있어?
엉덩이를 툭 치며 능청스레 내뱉는 농담, 며칠동안 우철이와 얘기하기 어려웠다. 조직표 한 귀퉁이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이름, 2-3 장우철. 우철이 너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런데 너는......
선생님, 뭐 안좋은 일 있었어요? 한동안 얘기도 안하고, 인사도 받는둥 마는둥...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금요일 점심시간 우철이가 점잖게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는 우철이의 손을 끌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에 가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철이가 멋쩍은 듯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말 안좋은 일 있었나봐요. ...아님 내가 뭐 잘못한 일 있나?
우철아... 넌... 너의 이름이... 왜 거기 ... 거기 있었지?
의아한 표정의 우철이에게 어렵사리 모든 얘기를 했다. 징계 위원회, 조직표, 그리고 그 한 귀퉁이의 우철이 이름. 우철이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더니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작년엔... 그랬어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 말을 남기고 우철이는 나의 손을 뿌리치고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들어서기 전, 우철이는 웃으며 뒤를 돌아 크게 손짓하며 외쳤다.
빨리 들어오세요, 쉬는 시간 다 끝나가요!
그렇게 교생실습의 한 주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학교 사회는 꼭 우물과 같아요.
전공이 생물이라 그런지 강선생님의 비유에는 유난히 동식물에 대한 비유가 많았다. 토요일 오후, 술이나 한잔 하자는 강선생님의 청유를 따라 찾아간 포장마차, 언제쯤 강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의지없이 휩쓸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던 강선생님, 그러나 누구보다 고민하고 아파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두 개의 가면. 묵묵히 고개 숙여 선생님들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 징계위원회에서의 굳은 행동, 이 두 개의 상반된 가면이 강선생님의 얼굴 위에 겹쳤다. 모르겠어. 강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학교는 우물, 교사들은 그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와 같아요. 조그만 우물 안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 속에 모든 것을 우겨 넣으려 하거든요. 교육개혁이니 뭐니 해서 젊고 활기찬 개구리들을 아무리 그 안에 떨어뜨려 봤자, 곧 그 우물 안의 개구리에 동화되어 버리거든요. 우물을 파서 개구리들을 들판으로 뛰어나오게 하거나 차라리 흙으로 우물을 메꾸어버리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르지요.
그럼 파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일개 교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이 사회의 광기어린 억압 구도를 학생들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서글플 뿐입니다. 학교는 지금 학생들에게 그 광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하구요.
포기하시는 건가요?
조금은 실망스러운 나의 목소리. 강선생님도 그걸 눈치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 아이들... 소시지... 학생들은 똑같은 포장지에 싸여 똑같은 상표가 찍혀 있는 과자 부스러기 따위가 아니란 말입,강선생님이 징계 위원회에서 외쳤던 말이 내내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의 소시지 에니메이션 잔상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일천구백구십사년의 H중학교..., 우물..., 개구리... 강선생님도 처음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자신의 비유대로 젊고 패기있는 개구리였는지도, 그리고 우물 안에 떨어져 몸부림 치다가 결국은 다른 개구리와 같이 우물에 안주하는 개구리가 되어가는지도 모르지. 말을 돌리고 싶었다. 강선생님 역시 그 이야기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눈빛이 역력했으므로.
나는 우철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담임선생님의 입장을 들어보면 우철이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었고, 또 그렇게 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처음에 우철이가 장난치며 다가오던 첫인상과, 징계 위원회에서의 조직표 한귀퉁이에 걸려있는 우철이의 이름, 그리고 점심시간에 우철이와 나누었던 이야기 등을 끄집어 내어 조금씩 풀어내었다.
우철인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어요.
강선생님은 조용히 우철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철이가 국민학교 육학년이었을 때, 리어카로 야채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이 어느날 새벽,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뺑소니를 쳤고, 아버지는 사고 현장에서 즉사, 어머니는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후 우철이는 이모의 손에 맡겨졌는데, 이모부의 잦은 매질과 욕설을 참지 못하고 중학교에 올라와 혁주의 서클과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우철이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이모부의 매질과 욕설은 심해졌고, 우철이는 다시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은 혁주의 서클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고 했다. 몇차례 학생 폭력 사건에 가담하기도 했고, 선도부 학생들을 폭행하여 몇번이고 징계를 받을 뻔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대리만족이랄까요? 우철이는 자신이 받은 폭력과 광기를 해소할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의 잣대로 아이들의 행동을 잴 때, 그 아이들의 행동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 결과에 집착하여 응징하려고 하지요.
우철이가 중학교 이학년에 올라갈 때가 되어 어머니께서 후유증으로 돌아가시면서 우철이에게 단단히 부탁을 하셨다고 했다. 당신의 아들이 광기에 전염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상을 뜨는 것이 못내 서러우셨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우철이는 그 서클에서 멀어졌으나, 완전히 발을 끊기는 어려웠을거라는 설명이었다. 배반자로 낙인찍어 응징하고자 하는 서클의 보복마저도 성인의 광기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한동안 잠잠한 듯 보였다. 그 서클은 와해된 듯이 보였고, 그것이 두목 한혁주를 퇴학시킨 결과라며 황선생님은 목에 힘주어 외치고 다니셨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정말 그렇게 보였다. 이상한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철이의 장난의 횟수가 줄어들었고 반짝이던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입가에 그 환하디 환하던 웃음이 사라져 간 것도 물론이다. 이번엔 내 차례다. 지난번 우철이가 나를 위로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우철이를 도닥거리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우철이는 가끔씩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왔다가 아무일도 아니라며 쪼르르 도망가곤 했다.
그렇게 교생실습의 둘째 주가 저물고, 셋째 주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서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주 수요일, 선도부 학생 다섯 명이 폭행을 당했다. 암암리에 떠도는 그 소문, 우철이가 혁주를 이어 그 서클의 두목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번에도 이학년 삼반 놈이야?
황선생님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그때 모두 퇴학시켜버렸어야 했다는 협박성의 발언도 빠지지 않았다.
어때요, 강선생님? 이래도 내가 틀렸다고 하실 겁니까? 그때 그자식도 잘라버렸어야 했단 말입니다.
강선생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황선생님의 호통을 묵묵히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나즈막히 중얼거리는 강선생님의 목소리가 황선생님의 분노를 돋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 번 술자리에서 우철이의 이야기를 할 때 연신 다행이지요, 다행이예요,를 중얼거리며 자그마한 미소를 보였던 강선생님, 그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스스로 우철이를 바른 길로 이끌어 냈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강선생님, 어쩌면 그도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 역시 내내 침울했다. 작년엔... 그랬어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우철이의 그 말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난 너에게 정직하려고 했어. 하지만 우철이 넌...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금요일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던 우철이의 손목을 낚아 채고 스탠드로 가 살며시 물었다.
사실이야?
우철이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실이야? 사실이야?만을 되뇌이고 있는데 우철이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두목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면 당장 퇴학당할텐데, 그게 그렇게 쉽게 알려지겠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긴 그게 이상하기는 했다. 혁주도 일년 반 가량을 그 서클을 이끌었지만, 그 실체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에 그들의 범행 현장이 적발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혁주의 실체가 드러났었으니까.
여전히 두목은 혁주 그자식이예요. 전 명목상의 두목일 뿐이구요. 소문도 그자식들이 낸 거예요. 제가 거절하지 못했으니까. 거절했다가는 또 흠씬 두들겨 맞을 테니까.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거절하지 못했죠. 소문은 그자식들이 낸 거라구요. 적어도 그 서클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학교 내에 명목상의 두목이 필요하니까. 됐어요?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쳐다보고 있는 나의 손을 뿌리치고 우철이는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들어설 때까지 우철이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우철이가 문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교생실습의 세 번째 주가 저물고 있었다.

실습의 마지막 주가 다가오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삼주간의 버거웠던 일들을 겪고 나니, 내가 교사가 된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훗날 내가 이러한 일을 겪게 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강선생님의 비유처럼 학교 사회가 우물이라면, 나도 역시 이 우물 속에 떨어져 좌절하고 포기하면서 결국에는 다른 개구리들 속에 동화되어가지는 않을 것인가 걱정되기도 했다. 강선생님처럼.
실습의 마지막 주는 무척 분주했다. 연구 수업을 해야했고, 학생들에게 곧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서운하게 흘렸다. 남는 시간이 있으면 아이들과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었고, 서로 연락할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기도 했다. 처음에 친해질 것 같았던 우철이와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우철이는 나를 피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우철이를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목요일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우철이는 종이에 자신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와서 내게 쑥 내밀고는, 나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적고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금요일, 우철이의 자리는 비어있다. 혁주의 빈자리 하나로도 교실은 허전한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수업시간 내내 걱정이 되었다. 거절했다가는 또 흠씬 두들겨 맞을 테니까.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았어요, 우철이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해진 약정 교안에 짜넣은 교과 내용을 삼분의 이도 채 끝내지 못하고 마지막 수업을 끝내야만 했다.
모든 실습이 끝났다. 마지막 날, 실습록과 몇 가지 실습 평가 자료만 제출하면 되니까. 집에 와서도 내내 우철이 생각만 났다. 왜 학교에 오지 않았을까, 몇 가지 나름대로 상황을 추측해보았지만 온갖 나쁜 상상만 떠올랐다. 아닐거야, 잘 있을거야, 잘 있어야 해,이런 생각들만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누굴까, 이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전, 낮게 헐떡거리는 목소리가 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선생님, 우철이예요.
슬금슬금 현관으로 향하던 나는, 깜짝 놀라 서둘러 문을 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우철이, 온 얼굴이며 옷가지가 피투성이에 흙투성이가 되어 서 있었다. 나의 입은 굳게 닫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등줄기를 타고 솟아 오르는 섬찟함에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몰골은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우철이는 웃고 있었다. 예전처럼 맑은 눈동자에 입가 가득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우철이.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힘겹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우철이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자식들에게 맞았어요. 신나게 맞았지요. 하지만 후련해요. 그런 모습으로 선생님을 보내기는 싫었으니까.
말을 마치고 우철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우철이를 쫓아 계단을 뒤어 내려갔다. 저만치 달아나고 있던 우철이가 우뚝 서서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보내 줘요. 비참해지니까.
내가 쫓아 가는 만큼 고개를 가로 저으며 뒷걸음질 치던 우철이는 내가 멈춰서는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돌아봐줘, 우철아, 한 번만, 너의 웃음을 볼 수 있게. 나는 우철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실습록과 몇 가지 실습 평가 자료를 모두 제출하니, 수업 종료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여기저기 교정을 둘러보며 이런 저런 추억들을 떠올려도 보았고, 이학년 삼반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번호 순서대로 떠올려보았다. 우철이의 번호와 이름에 나의 생각이 다다랐을 때, 나의 생각은 더 이상 뒤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늘도 우철이는 오지 않았는데. 우철이의 첫인상과 혁주의 퇴학, 그리고 일련의 일들이 차례대로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우철이와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때로는 흐뭇하게, 때로는 씁쓸하게 웃음지어 보았다. 웅성거리며 아이들이 뛰어놀던 점심시간의 이 운동장이 생각날 것이다. 그리고 운동장 한 귀퉁이의 울타리 옆의 농구대에서 열심히 농구공을 몰고 다니던 우철이의 생각.
농구골대를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얼핏 담장 너머에 누군가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벌떡 일어나 울타리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달려가는 것을 한동안 쳐다보고 있던 그 얼굴은 울타리 넘어로 사라졌다. 잠깐만, 너 우철이 맞지,라는 말이 입안을 맴돌고 있었다. 그건 분명 우철이였을 것이다. 훗날 나의 반 아이가 이런 일을 겪을 때, 난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동안 참아두었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습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여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이학년 삼반의 아이들과 몇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우철이에게도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많은 답장들 속에 우철이의 것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실습을 마친 지 두달여만에 다시 H중학교 이학년 삼반을 찾았다. 조용하지만 흐뭇한 눈으로 반가움을 표시해 주시는 강선생님, 국어교과를 담당하시던 J 선생님. 한쪽 귀퉁이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황선생님의 몽둥이에 엉덩이를 맞고 있었다. 여전하시네요,중얼거리는 나의 말을 들으셨는지 강선생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우철이는,이라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선생님은, 직접 아이들을 만나 보시죠,라며 마침 과학 시간이니 시간을 잠시 내주겠다고 하셨다. 아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설레임을 앞세우고 강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와아!하는 아이들의 함성이 터지고 나는 오는 도중 어떤말을 할까 생각해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었다. 자리 배치를 바꾸었는지 아이들의 자리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내가 찾지 못한 탓일까, 어디에도 우철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꾹 참고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섰다.
휴, 한시간 내내 수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아이들이 어찌나 아우성인지.
교무실에 내려와 기다리고 있는데, 강선생님이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생님께서 참 열성적으로 해주셔서 애들이 저렇게 좋아하나봐요,하며 강선생님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자리에 앉으셨다.
우철이는요, 우철이는요,라고 하려는 말을 망설이고 있는 나를 향해 한동안 말이 없으시던 강선생님이 우철이 소식이 궁금하신가 보군요,입을 열었다. 아까 죽 둘러보니 우철이가 보이지 않던데,라고 얼버무리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은 우철이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날 우철이가 그 서클 아이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다가 스스로 자퇴서를 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충주에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며 내려가서는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답장이 없었구나,하며 나는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광기도 전염되는 것이었을까, 그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이 편지를 열면 우철이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와 자신의 소식을 재잘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그토록 알고 싶어하던 우철이 소식인데.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역시 나쁜 추측 뿐이다. 편지를 펼치자 희미하게 검은 글자들이 흰 종이위에 웅성거리며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편지를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생각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서서히 또렷해지는 글자, 낯익은 우철이의 글씨.
할머니 댁에서 농사 일을 거들으며 검정고시를 준비했어요. 혼자 공부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지만 엄마, 강선생님, 그리고 교생선생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했습니다. 다행히 합격을 했구요.
삐뚤삐뚤하지만 제법 어른스러운 편지투, 우철이는 그 혹독한 광기에서 벗어날 자신이 생긴 것인지.
꿈이 생겼어요. 대학엘 가서 선생님이 될 거예요. 아직은 멀고 험해 보이지만 잘 할 수 있겠죠? 꿈이 생긴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언니도 알까? (히히)
장난스레 나의 엉덩이를 툭 치며 조잘거리던 우철이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여전히 남아있는 편지를 읽으며 그제서야 교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우철아. 우물안 개구리가 되긴 싫었어. 더 넓은 세상에 뛰어놀 수 있도록, 조금씩 이 우물을 넓혀 나가는 것도 좋겠지. 언젠가 그 우물이 넓은 바다로 향할 때까지. 강선생님도 분명히 그 꿈을 꾸고 계셨을거야. 먼 훗날 하늘을 모두 담을 수 있을만큼 큰 우물이 될 때까지, 수많은 강선생님이 아파하고 고민할테지. 더 이상 위 돈트 니드 노 에듀케이션을 중얼거리진 않겠어.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우철이의 맑은 눈동자와 해맑은 웃음, 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며 교문을 나서던 아이들의 음계 높은 재잘거림을 떠올리며 우철이의 편지를 고이 접어 봉투 속에 넣는다. 우철아, 다음번엔 주소도 꼭 적어야 해, 좋은 소식과 함께 말이야. 언제 왔는지 모르게 나의 강아지 아지가 나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