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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이전의 기록/Creative

[시]크레파스로 그린 집 / 1996년 作

크레파스로 그린 집 / 1996년 作


아가, 너를 위해
하얀 종이 위에 우선
평평한 땅을 그려줄께
모두 공평하게 딛고
서 있을 수 있도록
튼실한 기둥을 세워두고
지붕은 연한 푸른 빛이 어울릴거야
하늘빛을 닮은 색으로 말이야
한편으론 문을 내고 또
한편으론 창을 내야지
문은 제법 큰 것이면 좋겠어
모두들 넉넉히 들어와
푸근히 쉴 수 있도록
문은 열어두도록 하자
창문이 마주하는 쪽에는
징검다리 가로놓인 개울을 내고
듬성듬성 돋아난 들풀을 울타리삼아
넉넉한 정원도 하나 두고
얌전한 꽃 한 송이도 심어 두자
늠름한 강아지 한 마리도 잊지 말아야지
늘 곁에서 지켜줄 수 있게
아참, 강아지가 외로울지 모르니
조금은 장난스러운
병아리 한 마리도 필요할지 몰라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을 때
예뻐해 주도록 해
때가 되면, 꽃은 시들고
강아지는 숨 쉬는 것을 그만두고
병아리도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않게 되겠지만
그들에겐 生命이란 것이 있어
그건 장난감 나사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그렇게 자라고, 살아가고, 만나며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만
이젠 너에게 크레파스를 주겠어
문은 크게 열어두고
정원은 가능한 크게 넓혀두기로 해
너를 아끼는, 네가 아끼는
모든 이들을 불러모아
네가 그린 크레파스 집에서
함께 웃으며 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