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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이전의 기록/Creative

[시]인간에게도 수염뿌리가 있다면 / 1996년 作

인간에게도 수염뿌리가 있다면 / 1996년 作


1.
가끔은 돌아보는 것도 좋겠지
환상일랑 애초에 심어두지 말아
뿌리가 약한 녀석이거든
강한 중독성의 향기로 한때
너의 모든 것을 사로잡을지 모르지만
놈에게 견고함을 기대하지는 말아
한 귀퉁이의 작은 균열로도
쉽사리 무너지는 것이거든
그놈의 빌어먹을 환상은
이젠 뿌리채 뽑아버려

2.
불꽃처럼 살고싶진 않았습니다
나의 그늘진 곳으로 흐르던 한줄기 狂氣,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 스러지면 그뿐
물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조심스레 굽이치며 언 땅을 보듬고 돌아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한 그루 사과나무 뿌리의 갈증,
조금이나마 씻어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3.
여보게, 생각나는가?
그 벼랑 바위 틈새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허리 굽은 측백나무를
大氣 속에 가지와 잎새를
조심스레 박아두고
시나브로
뿌리를 키워가고 있지 않던가

4.
이젠 그만 쉬셔야죠
첫 아기를 기다리는
産母의 볼록한 배처럼
소담스레 돋아난 무덤
타향 살이 버거운 바람에 휩싸여
쉽사리 뿌리를 내리지 못하셨죠
저희들 걱정은 그만 접어두세요
골깊은 주름은 활짝 펴시고
아버지, 이젠
뿌리를 내리셔야죠

5.
보이세요?
지난 가을 뒷뜰 정원에
함께 조심스레 심어두었던
맨드라미 씨앗에서 돋아난
키작은 새싹 말이예요
솔바람에도 휘청거리더니
뿌리가 굵어진 모양이네요
이제는 제법 의젓하게
바람에 맞서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