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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이전의 기록/Creative

[시]인간에게도 수염뿌리가 있다면 / 1996년 作 인간에게도 수염뿌리가 있다면 / 1996년 作 1. 가끔은 돌아보는 것도 좋겠지 환상일랑 애초에 심어두지 말아 뿌리가 약한 녀석이거든 강한 중독성의 향기로 한때 너의 모든 것을 사로잡을지 모르지만 놈에게 견고함을 기대하지는 말아 한 귀퉁이의 작은 균열로도 쉽사리 무너지는 것이거든 그놈의 빌어먹을 환상은 이젠 뿌리채 뽑아버려 2. 불꽃처럼 살고싶진 않았습니다 나의 그늘진 곳으로 흐르던 한줄기 狂氣,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 스러지면 그뿐 물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조심스레 굽이치며 언 땅을 보듬고 돌아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한 그루 사과나무 뿌리의 갈증, 조금이나마 씻어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3. 여보게, 생각나는가? 그 벼랑 바위 틈새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허리 굽은 측백나무를 大氣 속에 가지와 잎새를 조.. 더보기
[시]크레파스로 그린 집 / 1996년 作 크레파스로 그린 집 / 1996년 作 아가, 너를 위해 하얀 종이 위에 우선 평평한 땅을 그려줄께 모두 공평하게 딛고 서 있을 수 있도록 튼실한 기둥을 세워두고 지붕은 연한 푸른 빛이 어울릴거야 하늘빛을 닮은 색으로 말이야 한편으론 문을 내고 또 한편으론 창을 내야지 문은 제법 큰 것이면 좋겠어 모두들 넉넉히 들어와 푸근히 쉴 수 있도록 문은 열어두도록 하자 창문이 마주하는 쪽에는 징검다리 가로놓인 개울을 내고 듬성듬성 돋아난 들풀을 울타리삼아 넉넉한 정원도 하나 두고 얌전한 꽃 한 송이도 심어 두자 늠름한 강아지 한 마리도 잊지 말아야지 늘 곁에서 지켜줄 수 있게 아참, 강아지가 외로울지 모르니 조금은 장난스러운 병아리 한 마리도 필요할지 몰라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을 때 예뻐해 주도록 해 때가 되.. 더보기
[시]닮아간다는 것--완행열차 / 1996년 作 닮아간다는 것 --완행열차 / 1996년 作 문득 나의 말 속에서 나의 것이 아닌 말투를 발견하고 누구의 것이더라 생각하다가 석달 전 군에 간 친구를 떠올렸다. 늘 숫기 없는 얼굴 붉히던 그. 짧게 자른 머리가 어색한 듯 연신 머리를 만지며 멋쩍은 웃음 흘리고 시큼한 깍두기 안주, 비어 가는 소주잔 속에는 서툴고 초라하지만 소중한 추억이 넘쳐흘렀다. 낮음 음계의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슬픈 노래를 웅얼거렸지만 결코 뒷모습만은 보여주지 않았던 그, ...를 만나러 가는 열차. 귀에 선 이름의 간이역을 뜨는 완행열차의 굼뜬 움직임처럼 그렇게 모르는 사이..., 조금씩... 그렇게 닮아가고 있었나보다. 더보기
[시]닮아간다는 것 --반짝이는 것들 / 1996년 作 닮아간다는 것 --반짝이는 것들 / 1996년 作 모든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어요. 비갠 뒤 생겨난 물 웅덩이, 보듬고 싶었지요, 장난스레 반짝이는 빛의 조잘거림을. 언제였던가 그들을 감싸 안으려 물에 들어갔어요. 아무 것도 건져내진 못했지만, 그제야 알았어요 소꿉친구의 눈에 더 맑게 반짝이는 빛이 있음을. 그때, 눈을 바로 보는 법을 배웠어요. 아빠 손 잡고 오르던 하늘 낮아보이는 언덕, 별들은 저마다 한 소절의 동화를 들려주며 반짝거렸지요. 품어보고 싶었어요 그들을, 그들의 노래를. 언제였던가 그들을 잡으려 아빠 어깨 위에서 하늘 향해 조막손 뻗어보았지요. 품지 못한 별은 하늘에 그대로 걸어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제야 알았어요 아빠의 눈에 더 포근하게 감도는 빛이 있음을. 어둠 사이사이로 .. 더보기
[시]그 겨울의 傳說 / 1996년 作 그 겨울의 傳說 / 1996년 作 그 도끼, 흉물이라 불렸어 그 숲에 나무하러 갈라 치면 어김없이 천근만근 아무도 그 도끼로 그 숲의 나무 베지 못했어 그 도끼, 광속에 처박혔지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도끼 자루, 그 숲에서 베어진 나무였다는게야 왜놈들 이땅 짓밟았을 때 순사 앞잡이 되어버린 돌쇠놈, 독립운동 앞장서던 제 애비 그 도끼로 쳐죽이고 전쟁났을 때 만득이놈, 빨갱이짓 한다고 제 동생 쳐죽였지 그렇게 피 머금어 그 도끼, 더욱 날 서고 단단해졌지만 그 숲으로 나무하러 갈라치면 천근만근 어김없이 아무도 그 숲의 나무 그 도끼로 베어내지 못했어 그 도끼, 흉물이라 불렸지 그렇게 많은 사람 쳐죽였음에도 그 숲 나무 베어내진 못했지 겨울 되어 그 숲에 삭풍불면 그 도끼, 붉은 선혈 뚝뚝 흘리고 바람소.. 더보기